심남일(1871~1910)은 1908~9년 사이에 전라남도으 3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지낸 함평 출신의 유생이었으나, 일제의 국권 침탈이 날로 심각해지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기삼연이 주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군경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 의병장 기삼연, 김율 등이 차례로 순국하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불러 모아 1908년 음력 2월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그는 의병 활동의 경험을 살려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심남일은 1908년 초 침체에 빠진 전남지방의 의병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아울러 전남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간의 연합의진인 호남동의단의 결성을 주도하여 연합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선생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하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8월부터 2개월간의 토벌은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어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피살,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9일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10년 10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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