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 등대에서 30m쯤 떨어진 곳에 바다를 향해 위쪽이 좁다란 평면으로 된 두 개의 바위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것을 '신선대(神仙臺)', 또는 '신선바위', '신선암(神仙岩)'이라 합니다. 신라시대에는
'풍월대'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이러한 명칭이 붙여진 것은 옛날 이곳에서 선녀들이 놀았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하며
태종대의 아름다운 전경을 자아내는 바위들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태종대를 신선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신선이 머물만한 아름다운 경치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옛날 신선(神仙)이 바로 이 바위 위에서 도끼자루가 썩는 줄 모르고 느긋하게 앉아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 신선대는 선녀들이 내려와 놀고, 아이를 낳기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바위에는 아이의 태를 끊는 가위와 실패의 흔적,
그리고 출산한 선녀의 오른쪽, 왼쪽 무릎이 닿은 흔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오른쪽 무릎에 힘을 더 주었기 때문에 오른쪽 흔적이 더욱 선명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임신을 한 여성이 이곳에서 빌면 순산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라의 태종무열왕이나 조선의 태종과 같이 삼국을 통일하거나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을 큰 인물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태종대 망부석은 앞쪽 넓은 부분이 태종대이고, 뒷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 망부석이다.
신선대 위에 외로이 서 있는 돌 하나는 망부석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바위는 망부석이라 부르는 것으로, 지아비를 애타게 기다리다 돌로 변한 여인의 전설이 숨어 있습니다.
옛날 왜구에게 끌려 간 지아비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눈보라가 치건 땡볕이 내리쬐건 굴하지 않고 일본 땅이 멀리서 보이는 이곳에 서 있었습니다.
여인은 돌처럼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덩이로 굳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전설을 따라 이 돌을 '망부석(望夫石)' 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망부석 전설은 한국의 여러 지방에 전해집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신라 눌지왕(訥祗王)때 박제상(朴堤上)의 아내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박제상은 일본에 볼모로 있는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체포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이곳 태종대에서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그대로 돌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훗날 사람들은 그 바위를 '망부석' 이라 불렀습니다.
망부석은 날씨가 좋을 때에 대마도가 육안으로도 잘 보이는 위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던 곳으로, 왜구들로 인한 어민들의 피해가 잦아 조선 조정에서도 고심했던 지역입니다.
일제시대와 해방기, 6.25동란기, 근대화기를 거치면서 실제로 바다에 나가거나 국외로 나갔다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사건이 벌어지면,
여인네들은 이곳에 와서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움과 한을 달래곤 했습니다.
전망대는 본래 자살바위라 불리던 곳으로 한때 천막식 사찰을 세워 떨어지는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죽어간 고혼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을 비관하여 전망대에서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진한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여 삶의 안식과 희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76년에 설치하였습니다.
재질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격은 폭1m, 높이 2m 입니다.
영도등대는 백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습니다. 1906년 12월 '목도(牧島)등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일제의 대륙 진출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선박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948년 절영도 등대로 바뀐 이름은 1974년 현재의 영도등대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목도와 절영도는 모두 영도의 옛 이름입니다.
근대적인 항로 표지시설인 등대는 1883년 7월 체결된 조선무역규칙 및 해관세복에 관한 조약 가운데 '한국정부는 금후 통상각항을 수리하고 초표를 설치한다'는 조문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도등대가 첫 불빛을 밝힌 1906년 12월 당시에는 석유 백열등이었으나, 지금은 120V, 1000W 할로겐램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등대 불빛은 11m 높이 콘크리트 탑 위에 18초마다 3회씩 깜박입니다. 그 불빛이 가 닿는 거리는 24마일, 자그마치 44㎞에 이릅니다. 300t 이상 선박의 운항 상황을 화면에서 추적할 수 있는 항행식별 시스템도 갖췄습니다.
부산항에 지금과 같은 모양의 등대가 들어선 것은 1906년 정부차원에서 5개년 계획으로 항로표지시설 건설 사업에 착수하면서부터입니다. 이때 지어진 등대가 바로 영도등대(당시에는 목장이 있는 섬 위에 위치한 등대라는 뜻으로 목도등대 혹은 절영도등대라 불렸습니다.) 영도등대는 1948년 절영도등대라고 이름이 바뀐 뒤 지난 1974년 행정구역명이 영도로 바뀌면서 지금처럼 영도등대라고 되었습니다.
부산해양수산청은 2002년부터 영도등대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 2004년 8월에 완공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같은 해 11월에 영도등대는 항로표지시설부터 자연사박물관, 해양도서실, 해양영상관, 갤러리, 전망대 야외공연장 등을 갖춘 해양문화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등대 점등개시(섬백광 15초격 7초간 4섬광 석유 백열등)
목도등대를 절영도 등대로 개칭
절영도 등대를 영도등대로개칭
영도등대를 영도항로표지관리소로 호칭변경
등명기 개량(PRB-20, 섬백광 매18초 3섬광)
DGPS 설치
국가전산망 인터넷 설치
해양문화공간 착공
해양문화공간 준공식
문의처 : 051) 405-1201
이용안내 : 10:00~17: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추석, 설날, 기타 운영상 휴관이 불가피 한 경우 등)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는 태종대 입구에서 정문을 바라보면 왼쪽에 보이는 하얀 첨탑입니다.
왼쪽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오르면 우람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흰색 첨탑(尖塔)의 위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결의와 적십자정신에 의거, 의료지원단을 파한하여 유엔군과 한국군의 전상자 치료와 난민구호에 공헌한 뜻을 기념하기 위한 탑 입니다.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는 대연동의 유엔기념공원과 함께 퇴역군인과 외교관들이 부산 방문 때마다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으로 1950년 6월에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결의와 적십자정신에 의거, 야전병원과 병원선 등 의료진을 파견한 의무지원국을 기념하는 비 입니다. 기념비 중앙에 우뚝 솟은 탑신에는 금속 패널로 참전국 6개국의 국기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부지 면적은 2,963㎡, 높이 20m, 폭 2m입니다.
덴마크, 인디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등 여섯 나라의 숭고한 업적을 찬양하고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1976년 9월 22일 국방부가 주관하고 부산광역시가 후원하여 조달청에서 태종대유원지 입구에 건립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부산시설공단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3국인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는 전쟁 중 의료지원단을 보내 전쟁 부상자를 치료했으며,
종전 후에도 얼마간 남아 민간인과 부상 군인을 치료하는 인도주의적인 구호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이 철수하면서 남긴 장비들은 현재의 국립중앙의료원 창설에 도움이 됐습니다.
국가명 | 참전일 | 귀국일 |
---|---|---|
덴마크 | 1951. 3. 7. | 1953. 8. 16. |
인디아 | 1950. 11. 20. | 1954. 2. 23. |
이탈리아 | 1951. 11. 16. | 1955. 1. 2. |
노르웨이 | 1951. 6. 22. | 1954. 10. 18. |
스웨덴 | 1950. 9. 23. | 1957. 4. 10. |
독일 | 1954. 2. | 1959. 3. 14. |
영도 태종대로 가는 길 왼쪽(영도구 동삼동)에 높이 솟아있는 하얀 기둥의 탑이 있습니다.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원들의 넋이 깃든 순직선원 위령탑 입니다.
해양입국의 큰 꿈을 안고 오대양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다 순직한 선원들을 기리는 이곳은
1979년 4월 12일 전국해운노동조합에서 세운 탑 입니다.
위령탑의 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썼으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해운산업과 이를 이끄는 선원의 중요성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순직선원 위령탑은 해발 100m 지점에 세워진 위령탑으로 부지면적 561㎡에 높이 46m, 폭 2.7m, 밑지름 9m 규모입니다.
여기서 해발 100m는 부산항 개항 100주년을 상징합니다.
오각형 뿔 탑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밑바탕의 다섯 날개가 다섯모꼴인 것은 오대양을 누비는 바다 사나이들의 굳센 의지와 꿋꿋한 기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탑의 하단은 밖으로 뻗어나가는 다섯 날개와 이를 받치는 둥근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대양 육대주를 형상화한 기단은 위령탑에 모셔져 혼령이 깃들어 쉬는 곳을 상징합니다.
기단을 중심으로 다섯 날개에는 선원들의 삶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선원들부터 어선에서 일하는 어부들, 바다로 나가는 한국 선박, 침몰하는 선박, 그리고 굳센 바다와 싸우는 선원들의 모습 속에서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해양한국을 개척하고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선원들의 면모를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위령 탑 뒤편에는 노산 이은상의 '위령탑의 헌시'가 새겨져 선원들의 숨은 기여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위령탑 아래에 설치된 위패 봉안소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지난 2001년 가건물 형태로 건립된 이후 2005년에 리모델링을 한 후 입니다.
순직선원 위령탑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위령제 행사가 열립니다.
순직선원 위패봉안 및 합동 위령제는 해양개척의 웅비를 품고 오대양 개척에 도전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순직선원의 영령을 봉안하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1979년 2,681위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9,329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태종대유원지 안에 푸른 해안선을 끼고 울창한 산림과 곳곳에 깎아 세운 듯한 기암괴석이 우뚝우뚝 솟아있고 천연자갈로 이루어진 자갈마당이 3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바다와 절경을 구경하면서 도시생활의 답답함을 시원스럽게 뚫어내는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으며,
이곳에는 해삼, 멍게, 소라, 전복, 성게 등 해산물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부산의 대표관광지인 태종대유원지 순환도로 일대에는 탁 트인 바다절경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곳 남항조망지는 부산의 대표항인 부산남항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면적은 약50㎡으로 목재데크, 조형벤치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야간에는 부산남항과 송도일원의 야경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04년도에 조성된 남항조망지는 휴식공간뿐만 아니라 바다경관을 배경으로 한 사진촬영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태종대가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이 이곳에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군사를 조련,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포토존을 배경으로 활쏘는 모습을 해 보며 소중한 추억을 남기세요.
주소: 부산광역시 영도구 전망로24(동삼동)
문화재번호: 40-2-15
소개
ㆍ 건립 : 1984년 9월 12일
ㆍ 규모 : 부지면적 336㎡ 비높이 1.5m
ㆍ 결연 : 함지골청소년수련관
ㆍ 수록내용 :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대한의 젊은 영도유격부대원들은 한푼의 보수나 대가 또
한 바람없이 다시 못 올 결의로 떠나던 날, 태종대 이 소나무 저 바위 밑에서
머리카락, 손톱 잘라 묻어 놓고 하늘과 바다로 적 후방에 침투하여 숨은 공을
세우다 못다 핀 젊음 적중에서 산화하니 아아! 그 죽음 헛되지 않아 호국의 넋
이 되어 국립묘지 합동위령비에 모셨도다. 가신 동지들의 요람지 태종대 반공
의 정기 어린 이곳을 못 잊어 작은 돌 하나 깎아 영도유격부대 유적지의 거룩
한 자취를 남기노라
※ 해마다 10월 3일 영도유격부대참전전우회 주관으로 추모제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