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자 | 이상용(전 경상남도지사) |
재질 | 동상(청동),받침대(대리석) |
규모 | 길이 3.8m, 폭 3.8m, 높이 12m |
시설면적 | 43㎡ |
설치연도 | 1956. 3. 20 |
기타사항 | 조각(김경승), 글(이은상), 글씨(오제봉) |
이 동상은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한 구국과 충절의 상징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입니다. 장군의 본관은 덕수, 이름은 순신이요, 자는 여해이며, 시호는 충무공입니다.
1545년(인종원년) 4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하시여 1576년 (선조9년) 무과에 급제하셨으며,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수군정비, 군비확충에 전력하셨고, 1592년 (선조25년) 왜군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해로 침입하는 적의 수군을 옥포, 사천,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웅천, 부산포 등 남해안 일대에서 섬멸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셨습니다.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의 생업보호, 산업장려 등에 주력하였으며, 1597년 (선조30년)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해전에서 적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으셨습니다.
다음 해 1598년 (선조31년) 12월 16일 일본으로 퇴각하기 위해 노량진 앞바다에 집결한 적함 500여척을 섬멸하던 중 장렬한 최후를 마치셨습니다.
장군은 충성심과 전략에 뛰어난 명장으로, 왜적과 싸운 7년 동안 난중일기와 시조에도 불후의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여기 서 계신 어른은 우리 겨레와 함께 영원히 같이 가시는 거룩한 지도자 충무공이시다. 그는 오색 찬란한 역사의 면류관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니 진실로 우리들의 자랑이요 영광이요 또 힘이요 생명이시다.
일찍이 이조 인종 원년(서기1545) 삼월 초팔일 서울에서 나시어 오십 사년간을 누리시고 선조 삼십일년(서기 1598) 십일월 십구일 새벽 노량 바다에서 적탄 아레 돌아 가셨으나 그 무렵 무너지는 나라를 한 손으로 떠받드신 위대한 은공은 강산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동포를 위하여 뿌리신 피는 자자손손 만대의 혈관속에 흘러 드신 것이다. 이제 그의 동상을 구태어 이 곳에 세우는 뜻은 저 임진란때 왜적이 이 땅에 첫발을 올려 놓은 곳이 바로 여기였기로 그날의 고난을 뼈저리게 기억하자 함이요 또 그가 왜적과 더불어 칠년동안 싸우던 중에서도 부산 앞 바다의 큰 승첩이 가장 결정적이었기로 그것을 왜치며 자랑하자 함이요 그리고 또 여기가 이 나라의 관문이라 예서부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국토수호의 피어린 정신을 안팎으로 나타내자 함이니 겨레여 두 팔을 들어 그를 찬양하고 또 그의 앞에 맹서하자.
동포를 살리려고 붉은 피를 뿌리신 이여 겨레의 가슴마다에 임은 살아 계시니이다. 강산에 서리신 뜻은 천추만대 푸르리이다.단기사천이백 팔십팔년 십이월 이십이일 김경승은 조각하고 이은상은 글을 짓고 동명서예원 오제봉은 글씨를 쓰고 경상남도 지사 이상용은 도민 전체의 힘과 정성을 모아 여기에 삼가 이 동상을 모셔 세우다.
주조 한국기계주물제작주식회사 대석 최학수
설치자 | 백산 안희제 동상 건립 위원회 |
설치일자 | 1989.9.7 (흉상교체 : 1994. 3. 2) |
규격 | 높이 3.5m, 폭 0.7m, 길이 0.9m |
구조 | 청동 |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은 3 ·1 운동 직전 기미육성회를 설립, 동아일보 창간주제 중외일보발간 등의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민족교육, 민족기업육성, 항일언론 등 다방면에 걸쳐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한 민족독립 운동가입니다.
현재 백산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백산상회를 설립·운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으며, 백산상회를 백산무역 주식회사로 확장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활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자(子)는 태약(泰若) 호(號)는 백산(白山), 본관(本貫)은 강진(康津)입니다. 백산 선생은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으며, 러일전쟁(1904)과 일제의 을사늑약(1905) 강제 체결 이후 백산선생은 계몽주의로 전환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신학문을 통한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백산기념관은 1995년 8월 15일 개관하여 부산. 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전시장에는 선생의 유품과 당시 구국운동 자료 등 80여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위치는 용두산공원에서 중앙로 방향 계단을 내려오면 기념관이 있습니다.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해 후미진 골짜기만 찾아드는데 해는 치우침을 싫어해 중천에서 비추인다 (님이 17세에 지은 시)
1885년 8월 4일(음력)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난 님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선비의 서슬푸른 의리 정신을 몸에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구국의 한마음으로 서울로 올라가 보성전문, 양정의숙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이때 교남 교육회를 만들어 의령을 비롯하여 영남 각지에 학교를 설립, 민족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나아가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격동된 서른살 안쪽 청년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 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기어코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 밖으로 떠나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민족해방운동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4년 가을께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창립하고, 장차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돋움케 하였다. 이로써 민족자본을 육성하는 한편 국외의 독립군 단체에 군자금을 보냈으며 나라 안팎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 사이의 연락 거점노릇을 하였다. 그리하여 3.1 운동의 전민족적 봉기를 준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건을 지원하고 스스로 연통제의 동맥이 되어 그 기관지 《독립신문》의 국내 보급통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기미육영회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국외 유학의 길을 터주고, 부산청년회를 만들어 지역 사회 운동의 터를 닦았다. 1927년에는 민중 생활 방위, 민중에 의한 산업 관리를 목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를 위해 잡지 《자력》을 발간하였다. 일찍이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던 님은 1929년에 중외 일보사를 경영하여 민족언론 수호에 진력하였다. 한편, 님은 1927년에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힘을 모아 신간회를 결성하자 이를 지지하고, 영남의 유림 지주들이 영남친목회를 결성하려 하자 그것이 지역 감정을 불러일으켜 신간회로 민족 역량을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여 분쇄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가 첨예한 항일투쟁의 무대가 되자 발해의 옛 수도 동경성으로 들어가 드넓은 땅을 개간하여 발해 농장이라 이름 짓고 발해 보통학교를 설립했으며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이로써 동포 이주민의 생활을 안정시킴과 함께 항일투쟁의 경제적 기반을 쌓고 민족교육을 베풀고, 대종교를 민족 정신의 고갱이로 삼아 이곳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육성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민족해방의 불씨를 지펴 나가던 님은 일제 경찰의 손아귀에 붙들려 아홉달 동안 모진 고문과 옥살이에 시달리다가 "집안 일이든 나라 일이든 오직 자력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는 유언을 남긴 채 1943년 9월 2일(음력 8월 3일) 쉰 아홉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일제에 맞선 투쟁에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나아가 비타협 절대 독립의 독립전쟁 노선을 굳게 관철해 나간 님의 의리정신, 민족의 협동 단결로 민족 해방을 달성하고 민중의 협동 단결로 민중경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님의 협동정신, 자력을 중심으로 민족자주독립, 민족자립경제 건설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님의 자력정신을 이어받아 올곧은 부산정신, 민족정신으로 뻗어 내리게 하고자 이곳에 님의 흉상을 세운다.
용두산공원비는 일제 말기인 1944.1.8.에 총독부에서 용두산공원으로 지정고시됨에 따라 이를 상징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높이 4.18m, 폭 1.56m, 길이 2.46m의 자연석으로 제작하여 1944. 1. 18. 설치하였습니다.
용두산공원비는 광복로 패선거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벽천폭포 전망데크 옆에 공원의 역사를 상징하듯 우뚝 서 있습니다.
재질 | 용탑(청동), 기단부(화강석, 오석) |
규모 | 높이 4.2m, 폭 1.45m, 길이 4.2m |
설치년도 | 1973. 10. 9.(진로주조 기증) |
특징 | 여의주를 움켜쥐고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은 부산시민의 역동적인 힘을 상징하고 있음 |
조각 | 홍익대학교 조각과 최기원 교수 |
설계 | 홍익대학교 나상기 교수 |
부산탑찬가 | 지은이(이은상), 글씨조각(김충현) |
여기는 이 나라의 관문 국토의 정기가 서려 맺힌 곳 백두산 힘차게 뻗어 내린 금정산맥 앞바다 푸른 물결 태평양 맞물렸네! 첨성대처럼 곧게 곧게 치솟은 탑 위에 높이 올라 저 멀리 바라보라.
통일과 번영과 자유와 평화의 큰 길이 영롱한 햇빛 아래 눈이 부시고 그리로 밀물보다 더 거세게 달려가는 이땅 겨레의 의기에 찬 모습 우리는 무궁화 피는 나라의 국민 조국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의 키가 여기 세운 이 탑보다 오히려 높다.
울분이 파도같이 벅차 오르던 어제의 피묻은 온갖 기억들 역사의 가시밭 고갯길 허위적거리며 고난을 참고 넘겨 오늘의 행진
그러나 우리는 어제와 오늘보다 차라리 다가오는 더 내일의 삶을 위해 가슴마다 의욕의 밑바닥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오색 진주알보다 더 찬란하고 왕관보다도 고귀한 땀속에서 인간의 즐거운 보람을 발견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속에서 지구위의 모든 민족과 민족을 위해 평화와 참뜻을 새겨본다.
1973년 노산 이은상 시
일중 김충현 씀